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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춘환(2004-06-16 20:39:59, Hit : 2968, Vote :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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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야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지난 세기는 피아노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20세기의 초반부터 종반을 관통하며 압도적인 기량과 출중한 음악성으로 환영받았던 인물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우리는 단번에 다음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리히테르 ,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

호로비츠의 탄생이 올해로 100주년이 된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본명이 고로비츠(Gorowitz, 1925년 베를린 데뷔 때부터 지금의 호로비츠라는 이름을 사용한다)였으며, 부유하고 지적인 부모 아래서 서적과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완벽한 테크닉과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주관에 입각해 빚어낸 호로비츠의 개성적인 피아니즘 역시 보통의 예민함과 보통의 감수성으로는 빚어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에프에서 탄생할 당시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 아버지는 기술자였고, 어머니와 누이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다.

피아노도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였던 또 하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배운 것이야말로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었다.

1923년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19세의 호로비츠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1882-1951)은 “호로비츠는 나에게서 레슨받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완성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작곡을 할 수 있는지를 그에게 물었었는데, 그는 수줍어하면서 네, 라고 대답했다.

이 무렵 그는 영웅처럼 환영받고 있었다. 호로비츠의 지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러시아를 떠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전했는데, 훗날 그가 나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을 무척 즐겁게 생각하고 있다”고 술회했다.

키에프의 음악원에서 호로비츠는 19세기 후반에 리스트와 맞먹는 명성을 누리며 러시아의 피아노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안톤 루빈스타인의 직계 제자인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한 뒤 17세에 졸업했다. 음악원 재학 시절만 해도 작곡가의 꿈을 지녔던 호로비츠였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핍박받는 환경 속에 피아니스트로 전향했다. 슈나벨이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었을 때, 이미 호로비츠의 기교는 독자적인 개성으로 빛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30년 호로비츠의 시카고 순회 연주에서 그의 연주를 들은 파데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호로비츠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독학으로 터득한 연주자인데, 특히 그의 리듬과 음감이 그걸 설명해 준다. 만일 그가 음악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지금의 연주력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상당한 경지에 오를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호로비츠는 요즘의 젊은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음악도이다.”

18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 연주회의 성공으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1925년, 21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가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28년, 뉴욕 필과 역시 차이코프스키 1번을 협연하며 이루어낸 카네기홀 데뷔 또한 그에게 성공을 안겼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성공만 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33년,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는 성공과 함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를 그의 품에 안겼다. ‘토스카니니의 사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6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20년이 채 흐르기 전인 53년, 다시 은퇴한다. 왜 이렇게 자주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것일까. 역시 그의 까다로운 성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호로비트의 최초의 침묵은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한 후인 1936년에서 39년 사이이다. 스위스에 있었던 이때의 그에게는, 그가 심각한 수술을 받았다거나 신경병증세로 치료를 받는다는 따위의 헛소문까지 나돌았었지만, 호로비츠는 홀연히 연주 무대로 돌아와 그전과 같이 다이내믹한 터치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호로비츠의 복귀는 루체른 축제에서 장인인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면서였다.

1953년 호로비츠는 다시 침묵의 은둔생활을 한다. 그것도 12년이라는 참으로 오랜 세월의 칩거였었는데, 훗날 이때의 심경을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이러한 말을 남기고 있다.

“연주여행을 갈 때마다 나는 기차를 타곤 했다.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잘 먹지도 못했으니, 기차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한 주일에 4회의 연주회를 치러야 할 정도였으니까 너무 힘든 시기여서, 갑자기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조용히 평화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싶어졌던 것이다.”

1965년 호로비츠는 카네기 홀에서 역사적인 재기 연주회를 가진다. 이때 순식간에 입장권이 매진되어 웃돈을 주며 표가 거래될 정도였다. 그후 70년대에 잠시 연주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또 그의 딸 소니아가 타계하자 상심하여 연주를 멈춘 적이 있기도 하다.

1965년, 지금은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를 카네기 홀에서 열었다. 이후 그가 남긴 역사적 연주회는 78년 백악관에서의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86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61년 만의 귀향 연주회’ 87년 베를린에서의 ‘최후의 연주회’ 등이다.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나간 호로비츠의 연주 기교는, 그런 그교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인 절제를 갖는 서정성에서 돋보인다. 호로비츠가 레퍼토리로 자주 선택하는 협주곡의 예는,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이다. 이 협주곡들에서 호로비츠는 다른 연주자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다이나미즘의 광채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낭만적인 판타지가 위축되어 버린 듯싶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을 세분해서 나누어 들으면 정서적인 변화는 곧 시적인 낭만으로 떠오른다.

이것은 어쩌면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해석하는 호로비츠만이 간직할 수 있는 내밀한 향수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호로비츠의 특성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나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에서 섬세한 색체감을 들려준다.

악마적 기교주의자’. 두말할 것도 없이 호로비츠는 한 세기 몇 나올까 말까한 테크니션이다. 마치 악마의 사주라도 받은 듯한 그의 거침없는 기교의 향연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주술적인 제의를 연상하리만치 무시무시한 효과를 낳는다. 그가 1930~40년대의 젊은 시절 최 전성기였다지만, 팔순을 넘기고도 라흐마니노프나 리스트·스크리아빈 등의 연주를 듣고 있자면 그가 얼마나 악기에 대한 장악력이 대단했었는지 느끼게 해준다. 그가 연주하는 리스트 소나타 b단조가 커플링 된 메피스토 왈츠(RCA)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 온갖 지성(기교)을 장악한 메피스토펠레스의 재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는 분명히 까다로웠다!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라는 그의 순간적인 의문은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만들어냈다.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도 연주회에 꼭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까다로움’에 항상 감사해야 했다.

89년 심장발작으로 사망,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무덤 옆에 묻혔다. 15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을 남긴 호로비츠. 그중에서 ‘이것이 그의 명반이다’라고 꼬집어 내기 무척 힘들다. RCA 레이블의 호로비츠 전집은 그의 예술혼을 엿보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역사적 귀환’ 실황녹음(소니), 최만년의 도이치 그라모폰의 소품 위주의 녹음 등도 새겨들을 만한 음반들이다

오늘날 그의 부재가 한없이 큰 공백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런 낭만적 전통을 계승하여 들려주는 피아니스트가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새로이 등장하는 신예들 중에 유독 ‘호로비츠의 재래’ 라는 타이틀로 데뷔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은 것으로 보면, 그의 영향력과 생명력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유효함을 일깨워 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부재는 단순히 한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사라졌다는 것을 넘어서 화려하게 빛나던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피아노를 칠 때 목표로 하는 것은 ‘피아노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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