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의 우리이야기 | astra.pe.kr
처음으로  |  사이트맵  | 
    
별이이야기 
자유이야기 
음악이야기 
손님이야기 
남집이야기 
방명록 *
자유스럽고 부담없이 이야기 하는 자유게시판입니다. 좋은 분위기가 유지될수 있도록 서로 예의를 지켜주세요.
광고나 비방글등 보다는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


  최춘환(2004-06-16 20:39:23, Hit : 2990, Vote : 425
 http://www.astra.pe.kr
 [음악이야기]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살아있을 때 부터 전설이라고 불리워진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설이 우리들 곁을 떠났을 때 우리 시대 마지막 전설이 사라졌다고 했다. 맞다. 그는 너무나도 큰 존재이며, 전설이었다.

그에 대하여는 모든 것이 다 이야기 되고, 수많은 레코드도 나와 있다. 그러나, 냉전시대 철의 장막 저쪽에서 활약하는 명 피아니스트를 보고 있던 무렵이나 지금이나 그에대한 것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 나 거대한 전설로 남아 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Sviatoslav Richter, 1915-1997)는 지휘계에서의 므라빈스키나 카라얀의 존재감을 훨씬 능가 하는 존재이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 아버지를 둔 리히터는 1915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가였지만, 그에게 피아노의 초보를 가르킨것 이외에는 음악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리피터는 음악교육을 달리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즉, 기초부터 독학으로 배운것이다. 이러한 예는 대 피아니스트라고 일컬어진 사람의 경우 달리 그 예가 없는 것이다.

독학으로 이미 16세가 되기전에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를 암보를 연주할 정도의 고도의 테크닉을 몸에 지니고, 대부분의 곡을 초견으로도 연주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가 피아노를 익힌 것은 거의 완전한 독학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훗날 나타나는 그의 대단히 강렬하고 개성적인 곡 해석은 음악가로서의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완전한 독학으로 지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독학으로 악기와 음악을 배운 사람이 그러한 집중력 높은 해석과 완벽한 기교를 몸에 익혔다는 것은 달리 그 경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로부터도 배우지 않은 채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피아노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재능을 지녔던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0세에 공식적인 데뷔를 하고 22세때 겐리프 네이가우스의 제자가 된다.

전설적인 피아노 교수인 네이가우스는 당시 리히터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 호리호리하고 매력적인 젊은이가 들어오더니, 피아노를 놀랄 만큼 훌륭하게 연주했다. '이 사람은 천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즉석에서 제자로 맞았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여기서 그는 거의 10년 동안 노이하우스에게 배웠는데, 노이하우스는 "리히터처럼 음악적으로 뛰어난 지평을 지닌 사람을 일찌기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이미 음악가로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리히터도 의심할 여지 없이 이 훌륭한 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이 "노이하우스가 나를 피아니스트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당시 네이가우스가 리히터에게 가르친 것은 오케스트라 반주를 할 때 버릇이 이었던 어깨를 흔드는 것외에는 가르칠께 없었다고 전해지며 후에 네이가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나는 리히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리히터가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종종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의 연주에서는 리듬적인 요소들이 너무나 강하고, 리듬이 논리적이며 조직화되어 있고, 엄격하면서도 자유롭기 때문에 그가 연주하는 작품의 전체적인 결과도 그와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므로 때때로 몸짓을 통해 그의 연주에 동참하게 되는 유혹을 버릴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피아니스트가 지적으로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는 큰 규모의 작품을 잘 소화할 수 있고 그가 우둔할수록 그는 큰 작품을 소화할 수 없게 된다. 첫째 경우의 피아니스트는 멀리 볼 수 있는 사상을 지닌 사람, 다시 말하면 수평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두번째 경우는 단견을 갖고 있는 사람 즉 바꾸어 말하면 수직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리히터의 연주 리듬을 찬탄해 마지 않는 이유다.

사람들은 리히터의 연주를 들으면, 그가 연주하고 있는 작품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작품 전체가 자신 앞에 무한한 대지로 펼쳐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한번 보고 금새 알아차릴 수 있도록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으며, 모든 구체적인 부분들이 마치 독수리가 무한히 높은 곳까지 비상하듯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앞으로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종종 만나거나 알고 지내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리히터와 같은 통일성과 구조, 음악적으로 폭이 넓고 예술적인 지평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의 연주를 거의 다 들어 보았다. 호프만, 부조니, 고도프스키, 카레뇨, 로장탈, 달베르, 자우어, 에시포바, 자펠니코프, 메트너, 그리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연주도 거의 들어보았다...

특히  스승이었던 네이가우스는 리히터의 천부적인 재능을 아껴 음악원의 보통 학생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 즉 시험을 치른다든지 일반교과의 수업에 들어가는 것 등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주었다. 그리고 이 뛰어난 제자에 대해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아아, 나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리히터의 재능에 감탄하다가 죽게 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리히터로부터 계속 무언가를 배우게 될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터를 ‘대기만성형’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22세의 나이에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린시절의 그의 천재성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문하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위대한 스승이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유달리 아꼈기 때문이다.

네이가우스의 적극적인 가르침과 후원으로 프로코티에프에게 소개된 리히터는 이 작곡가의 피아노 소나타 제 6번을 초연하게 된다. 리히터는 1940년 11월 26일 25세의나이로 사실상의 데뷔가 되었으며, 프로코티에프의 작품에 관한 한 최고의 연주자라는 영예를 50년 이상 유지시켜 준 계기가 된다.

이후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7번,9번의 초연도 리히터에게 맡겼으며 9번은 리히터에게 헌정되었다 당시 전생소나타의 첫 시발점이 이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선뜻 맡긴 것은 리히터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연주후 프로코피에프는 내 작품이 이렇게 대단한지 그대의 연주를 듣고 알았다..라고찬사를 보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비록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소식이 끊기긴 했지만, 1945년 구 소련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소련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게 된다.

1950년 무렵부터 외국으로 순회 연주를 다니기도 했는데 주로 동유럽 국가와 중국에서 연주 활동을 벌이다가, 그의 명성을 전해들은 서방에 의해 1960년 미국을 방문하여 성공적인 연주회와 함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와 20년만에 재회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로부터 3년 후에 서독에서 사망했는데, 그 무렵 리히터는 서방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소련이 2차 세계대전후 처음으로 서방에 내보낸 피아니스트는 리히터가 아닌 길레스였는데, 이는 어떤 이유였을까..길레스는 미국에서의 인터뷰에서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리히터란 거대한 산이 있다는 말 함으로써 철의 장막속의 인물에 대한 신비를 가지게 했다. 왜 길레스를 먼저 서방에 내 보내었는가는 잘은 모르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소련의 예술 성과를 알리는데는 성공했다.

리히터의 이름을 서방에 확실히 알린 두 사람은 글렌 굴드와 반 클라이번이다. 글렌 굴드는 1957년 모스크바 연주 여행을 왔다가 리히터의 연주회에 참석했다. 첫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소나타 D.960이었는데, 리히터의 Melodiya 음반을 들으신 분이라면 그의 1악장 템포가 얼마나 느린지 잊기 힘드실 것이다. 굴드 왈, "그 순간 나는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음악 전달자를 보고 있었다."

반 클라이번은 그 유명한 1958년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했다가 리히터의 연주를 들었다. 그는 흥분된 얼굴로 단언했다. "내가 들은 중 가장 강력한 연주다." 에피소드로는, 반 클라이번이 연주할 때 당시 차이코프스키 콩쿨에는 심사위원으로 리히터가 있었는데 반클리라번에게만 10점만점을 주고 나머지 연주자에게는 0점을 주어 많은 화재를 낳기도 했다. 그 이후 리히터에게는 콩쿠르 심사위원 위촉이 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늦게 시작했다는 시각은 첫째 서너 살만 되면 피아노 앞에 앉히는 20세기의 잘못된 음악교육관행 때문에, 둘째 그가 40이 넘도록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채 숨은 공력을 쌓았기 때문에생겨난 것이다. 그가 서방세계에 알려진 순간부터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듯한 파장을 퍼뜨린 것이 이를 증명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흥행사 솔 휴로크는 그 이후 리히터를 초청하려고 노력했으나, 이 계획은 1960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시카고 심퍼니와 라인스도르프의 지휘로 브람스의 협주곡 2번을 연주했고, 이 연주의 인상이 어땠는지는 연주회 직후의 녹음(RCA)으로 추측
할 수 있다.

60년 그가 45세의 나이로 서방 무대에 등장하면서 그 전설은 더욱 확고 해졌는데,카네기 홀에서 그 후 열린 전설적인 연주로 그의 명성은 완전히 확립됐다.  특히 미국의 비평가들은 『이제껏 만난 연주자들 중 가장 빼어난 피아니스트』라거나 『오케스트라 전체와 맞먹는 소리』『연주곡 에 대한 경이적인 통제력』 등등의 찬사로 그를 경배했다.
다음 해부터 서유럽을 연주 여행하면서 그는 명실공히 호로비츠, 제르킨, 루빈슈타인 등에 비견할 수 있는 20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올라섰다

리히터는 서방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이미 「전설」이 돼 있었다.리히터의 연주는 자신이 악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음악적 경험과 자유를 청중들이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체험의 순간을 놓치지 않도록 강열한 어조로 다가온다. 또한 해석의 다양함과 추진력으로 인해 색다른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의 연주에서 테크닉의 난이도는 이미 음악과 별게의 것으로 여겨진다. 테크닉만으로 본다해도 그는 세계 초 일류의 피아니스트일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연주여행 중에도 하루 약 10시간의 연습을 거른 일이 없다고 하는데,이는 굉장한 집중력을 수반한 연습이였으며, 이는 자기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부족한 점( 예를 들어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 결과 주법의 문제점- 리히터의 주법은 과거의 주법이라고 한다.)을 채워서 완벽한 음악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리히터의 연주는 즉흥성이 강하여 연주 때 마다 표현의 폭이 크다.

리히터의 음반은 메이저에서 마이너 레이블까지 다루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방대함을 자랑하는데 1955년-70년대 음반들은 공히 인정된 최고의 명반이며 그리고, 그의 주된 레퍼토리는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무소르그스키, 프로코티에프 그리고, 가장 아낀 바흐의 평균율등이 있다. 특히 그는 변주곡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고미술품 수집을 좋아하며,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시대 마지막 살아 있는 전설은 1997년 8월 1일 우리곁을 떠났다.

쇼팽콩쿨 우승자인 당 타이손은 모스크바 음악원 유학시절 리히터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리히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대 선배였다. 내가 다니던 시절에는 이 거대한 전설의 피아니스트가 서방 세계에 알려서 열광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솔로 뿐 아니라 성악 반주나 실내악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독일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과 함께 자주 공연했다. 부인인 니나 역시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성악가였는데 두 사람 곁에는 많은 음악가들이 모여들었다.

보로딘 현악사중주단,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 바이올린의 올레그 카간, 카간의 아내이자 첼리스트였던 나탈리아 구트만, 피아니스트 앨리스 뷔르사라제 등등이었다. 이들은 '리히터 패밀리'라고도 불리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유리 바슈메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리히터 패밀리라니요, 제겐 너무 과분한 얘깁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리히터는 신과 같은 존재거든요. 하지만 연주를 할 때는 리히터도 한 사람의 겸허한 인간이 됩니다. 그가 처음 대하는 작품일 때는 제게 작품에 대한 것들을 물어옵니다. 그리고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지요. 이건 거장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나탈리아 구트만의 평가역시 리히터가 여러 가지 면에서 '대가'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리히터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잘 읽어냅니다. 맘에도 없는 소리를 잘 하는 사람은 곧바로 멀리하지요. 음악에서도 이러한 인간성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장식하지 않고 억지 힘을 넣지 않고 그야말로 자연스런 상태의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진실된 삶의 태도와 음악이 존경스러운 겁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그의 죽음이 주는 쓸쓸함을 방대한 레코딩으로부터 위안받을 수 있음에 안도한다. 그는 레코딩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의 음반이 대부분 관객의 기침소리와 부스럭거림, 박수와 환호로 채색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80회 생일 때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영감과 미에 대한 사랑의 원천』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살아남은 자들은 오랫동 안 그의 음반으로부터 영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음악이야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피아노 연습법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zero
이용안내 | 개인정보 보호정책
Copyright(c) 2001. astra.pe.kr. All right reserved. Contact us webmaster@astra.pe.kr